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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쇼크와 경제 위기 (1973, 1979년): 중동발 석유 파동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by essay7576 2025. 4. 9.

오일쇼크와 경제 위기 (1973, 1979년): 중동발 석유 파동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1970년대는 한국 경제가 중화학공업화와 산업화를 통해 급속한 발전을 이루던 시기였지만, 동시에 예기치 못한 외부 충격으로 인해 커다란 시련도 겪었다. 바로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다. 1973년과 1979년에 발생한 세계적인 석유 파동은 한국 경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고, 물가 상승, 수입 원자재 비용 급증, 성장률 둔화 등 다방면에서 위기를 초래했다. 이 글에서는 두 차례 오일쇼크의 배경과 충격, 정부의 대응 전략, 그리고 장기적인 구조 변화에 대해 심층적으로 다룬다.

 

 

 

오일쇼크와 경제 위기 (1973, 1979년): 중동발 석유 파동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오일쇼크와 경제 위기 (1973, 1979년): 중동발 석유 파동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

제1차 오일쇼크 (1973년)와 한국 경제의 충격


오일쇼크의 발발 배경과 세계 경제의 충격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하자, 이에 대응해 아랍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서방 국가에 대한 원유 수출을 중단하거나 감산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를 통해 석유 가격은 순식간에 4배 가까이 급등했고, 세계 경제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석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경제 마비 상태에 빠졌고, ‘스태그플레이션’(불황 속 물가 상승)이 세계를 휩쓸었다.

한국은 당시 원유의 99%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충격은 곧바로 국내 산업계와 생활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수입물가 상승과 물가 폭등

한국은 1970년대 초까지 수출 증가와 투자 확대로 고도성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1974년부터 원자재 수입 가격이 폭등하면서 산업 생산비가 급증했다. 특히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등의 에너지 집약 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제품 가격도 동반 상승했다.

1974년 소비자물가는 전년 대비 24.3% 상승하며 전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는 일반 국민의 생활비 부담을 급격히 가중시켰고, 실질임금은 하락하면서 가계 소비가 위축되었다. 식료품, 교통비, 전기료, 연료비 등이 일제히 오르면서 중산층 이하의 가계는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정부의 대응과 에너지 대체 노력

박정희 정부는 오일쇼크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 에너지 절약 캠페인 ▲야간 전력 제한 ▲대중교통 이용 장려 ▲석유 제품 소비 통제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더불어 중장기적으로 에너지 수입선 다변화와 석유비축 정책, 원자력 발전 확대를 추진했다.

1978년에는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가 가동되면서 본격적인 에너지 공급 다변화가 이루어졌다. 또한 석유 소비를 줄이기 위해 산업 구조 재조정이 모색되었고, 석탄, 수력 등 대체 에너지 개발도 본격 추진되었다. 이 시기는 정부가 자원의 전략적 관리를 고민하기 시작한 첫 계기였다.

 

제2차 오일쇼크 (1979년)와 중화학공업 경제의 시험대


이란 혁명과 석유 가격 재급등

1979년, 이란에서 반서방 정권인 이슬람 혁명이 발생하면서 석유 수출이 중단되었고, 이에 따라 국제 유가는 또다시 2배 이상 급등했다. 제2차 오일쇼크는 제1차보다 단기간에 더 강력한 가격 충격을 주었고, 이미 고물가에 시달리던 세계 경제를 다시 침체로 몰아넣었다.

한국은 여전히 에너지 수입 구조의 대부분을 중동 지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취약했다. 특히 1970년대 중반 이후 중화학공업에 집중 투자된 산업 구조는 에너지 소비가 많았기에, 제2차 오일쇼크는 정책의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내는 시험대가 되었다.

 

물가·환율 불안과 경기 침체

1979년 말, 한국의 소비자 물가는 전년 대비 21.6% 상승했으며, 동시에 원화 환율도 불안정해졌다. 외환 보유고가 급감하고, 수입 대금 결제가 어려워지면서 금융 시장도 흔들렸다. 특히 대외 수출이 둔화되고 내수 소비도 위축되며, 투자 축소와 생산 감소가 동시에 일어나는 불황이 시작되었다.

중화학공업화로 늘어난 기업 부채와 설비 과잉 투자는 경제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일부 기업은 연쇄 부도를 냈고, 금융기관도 대출 회수에 나서며 신용 경색이 발생했다. 이는 중소기업과 하청업체들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고, 고용 감소와 실업 증가로 이어졌다.

 

 정권 교체기와 정책 공백 속의 대응

1979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해로,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혼란이 있었다. 정권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경제 위기에 대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대응이 어렵게 되었고, 여러 정책들이 일관성을 잃고 단기 처방에 그쳤다.

이 시기 정부는 물가 안정 대책, 에너지 절약 정책, 재정 긴축 등을 단기 대응책으로 내놓았지만, 구조적인 산업 개편이나 거시경제 재설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위기를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경제 정책에 대한 신뢰 하락으로 이어졌다.

 

오일쇼크의 장기적 영향과 경제 체질 변화


에너지 자립 노력과 원자력 확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는 한국 정부로 하여금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이 확대되었고, 원유 수입선 다변화, 천연가스 개발, 신재생 에너지 기초 투자 등이 장기 전략으로 추진되었다.

고리 원전을 시작으로 월성, 영광(한빛), 울진(한울) 등 다수의 원전이 건설되면서 한국은 아시아 주요 원전 보유국으로 부상하였고, 현재는 원전 기술 수출까지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는 오일쇼크의 고통이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자립 기반 강화로 전환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산업 구조 조정과 기술 개발의 시작

1970년대 후반의 위기는 산업계에 ‘기술 경쟁력 강화’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수입 원자재와 에너지에 의존하는 산업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업들은 기술 개발, 생산 효율화, 품질 개선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정부는 기술개발특별회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지원 강화, 전자산업 육성, 반도체 개발 등을 통해 고부가가치 산업 중심의 전략으로 전환했다. 이는 훗날 삼성전자, LG 등 한국 대기업들이 글로벌 기술 기업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복지·분배 정책의 부재와 사회 불안

한편,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는 서민층과 저소득층에 가장 큰 타격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부는 복지 정책이나 분배 구조 개선에는 소극적이었다. 그 결과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되었고, 이는 1980년대 이후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 확산의 주요 배경이 되었다.

물가 상승과 실업 증가는 도시 하층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청년 실업과 고졸자 취업난은 사회 불만을 키웠다. 이는 부마항쟁, 서울의 봄,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 정치적 격변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위기에서 기회로, 오일쇼크가 남긴 교훈


1973년과 1979년의 두 차례 오일쇼크는 단지 석유 가격의 급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 경제가 외부 의존적 성장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시험대였으며, 동시에 자립적 경제체제 구축을 위한 계기이기도 했다.

정부와 기업은 이 위기를 통해 에너지 안보, 기술 독립, 산업 재편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이는 이후 1980년대 고도성장과 민주화 시대를 준비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위기 속에서 방향을 바꾸고 체질을 개선한 경험은 오늘날에도 경제 위기를 대처하는 중요한 교훈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