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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7~1971년):중화확공업 기반과 산업도시의 탄생

by essay7576 2025. 4. 8.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7~1971년):중화확공업 기반과 산업도시의 탄생

 

박정희 정부는 1차 경제개박 5개년 계획(1962~1966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1967년부터는 보다 본격적인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중화학공업 육성의 기틀을 다지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이 시기는 한국이 단순한 경공업 중심의 수출국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경제 구조 전환을 준비한 시기였다. 오늘은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에대해 알아보려고 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 배경, 산업 전략, 도시화와 사회변화까지 세 가지 핵심 소주제를 중심으로 심도 있게 살펴보자.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7~1971년):중화확공업 기반과 산업도시의 탄생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1967~1971년):중화확공업 기반과 산업도시의 탄생

 

계획 수립의 배경과 목표: 경제 구조의 도약을 꿈꾸다


1차 계획의 성과와 그 한계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은 한국 경제에 자신감을 심어주었지만, 동시에 몇 가지 구조적인 문제를 드러냈다. 첫째, 경공업 중심의 성장 전략은 국제 경쟁력 측면에서 점차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수출은 증가했지만, 여전히 고부가가치 산업이 부재했고, 대부분의 수출 제품은 값싼 노동력에 의존한 저부가가치 제품이었다.

둘째, 농업과 공업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도시와 농촌 간의 소득 격차도 심화되었다. 셋째, 원자재 수입과 자본재 수입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국제수지 적자가 만성화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 수출 확대가 아닌, 산업 구조의 고도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 같은 상황에서 국가의 경제 체질을 보다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했고, 그것이 바로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출발점이었다.

 

2차 계획의 목표와 전략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년)은 경제 성장률 연평균 7% 달성이라는 구체적인 목표와 함께, 다음과 같은 핵심 전략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중화학공업 기반 마련: 철강, 기계, 화학, 전자 산업의 기반 조성

수출 확대와 수입 대체 병행: 수출 확대는 유지하면서도, 내수 생산을 통해 수입 의존도 감소

농업 생산성 향상: 농촌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한 생산기술 개선

사회간접자본(SOC) 확충: 공업화를 뒷받침할 교통, 통신, 에너지 인프라 정비

산업 중심 도시개발: 지역 산업단지 조성을 통해 균형 발전 도모

이 계획은 단순히 성장률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경제 구조 전환과 장기적 자립 기반 마련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이전 계획과 차별화된다.

 

정치적 안정과 국제 정세의 변화

1967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해로,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의 안정성을 확보한 시기였다. 또한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이 심화되면서 한국은 미국의 군수 물자 생산을 수주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수출 확대와 외화 획득이 가능해졌다.

또한 1965년 체결된 한일국교정상화와 청구권 자금(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본격적인 유입도 2차 계획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자금은 주로 산업 기반 시설과 공업단지 조성에 투입되며 한국 경제의 구조 전환을 가속화했다.

 

중화학공업과 산업 기반 육성: 고도성장의 동력


철강 산업과 기계 공업의 태동

2차 계획의 중심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이 있었다. 특히 철강 산업은 한국 산업의 뼈대를 구성하는 핵심으로 여겨졌다. 당시 한국은 철강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고, 이는 경제 자립을 위협하는 주요 요소로 간주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영 철강 기업 설립 계획을 수립했고, 이후 제3차 계획에 이르러 포항제철(현 포스코) 설립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기계 공업 역시 주목을 받았다. 건설기계, 선반, 공작기계 등 자본재 생산 능력 확보는 제조업 전반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정부는 국방산업과 민간 기계 산업을 연계해 기술 축적을 꾀했으며, 기계공업단지(창원 등) 조성이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화학 및 전자산업의 태동

화학 산업은 비료, 농약, 섬유 소재, 플라스틱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산업 기반이 되는 중요한 분야였다. 정부는 비료공장을 확장하고, 석유화학 제품 생산을 위한 기반 시설을 구축하였다. 이 시기 여천(현 여수) 등지에 화학 산업단지가 들어섰고, 이후 한국의 석유화학 산업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전자산업은 아직 초기 단계였지만, 군수 물자 수출과 일본·미국의 기술 도입을 통해 흑백TV, 라디오, 트랜지스터 등 소형 전자제품의 조립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는 향후 삼성, LG, 현대 등의 전자 대기업 성장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

 

기술 교육과 인력 양성의 중요성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단순 노동력 이상의 기술 인력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기술학교, 직업훈련소, 공업고등학교 등을 적극적으로 확충하고, 서울공대(현 서울대 공대), 한양대, 고려대 등에서 산업 기술 중심의 고등교육 과정을 개편하였다.

또한 해외 유학생 파견, 기술자 연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첨단 기술을 도입하고 국내 기술로 전환하는 과정도 병행되었다. 이러한 인적 자본의 축적은 한국 산업이 외국 자본과 기술 의존에서 벗어나 자립형 경제 구조로 나아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도시화와 사회 변화: 산업 발전이 만든 새로운 생활


산업도시의 성장과 인구 이동

2차 계획이 본격적으로 실행되면서 전국 각지에 산업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서울뿐 아니라 부산, 대구, 울산, 인천, 광주 등 주요 거점 도시가 빠르게 성장했고, 정부는 각 도시에 특화 산업을 배치함으로써 산업의 지역 분산과 균형 개발을 도모했다.

이와 함께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1960년대 후반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 비중은 50%를 넘어섰으며, 이는 이전에 비해 매우 급격한 변화였다. 농촌의 노동력 유출과 도시의 과밀화 문제가 동시에 나타났지만, 전반적으로는 산업 발전에 따른 노동력 재편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주거, 교통, 생활 인프라의 변화

도시화와 함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주거 양식의 변화였다. 전통적인 한옥에서 벗어나, 아파트, 다세대 주택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또한 전기, 수도, 전화 등 생활 인프라가 급속히 확산되며 국민의 생활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다.

교통 인프라 또한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경부국도와 경부선 철도는 산업과 인구의 흐름을 유도했고, 버스 교통의 확대, 시외버스 노선 정비 등이 이루어졌다. 이는 산업도시 간 연계성 강화뿐만 아니라, 지방 경제 활성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회의식의 변화와 국민 정체성 형성

이 시기 국민들은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 아래, 근면·성실·저축 같은 산업화 시대의 가치를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TV, 라디오, 교육 등을 통해 국민 계몽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경제 성장이 곧 국가 발전이라는 인식이 뿌리내렸다.

또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확대되었고, 특히 경공업 및 봉제 산업을 중심으로 여성 노동력이 경제 성장의 중요한 주체로 부각되었다. 이는 전통적 가부장제의 약화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성 역할 인식 변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2차 계획의 성과와 그 의미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경제 성장의 양적 확대와 동시에, 질적 전환을 모색한 시기였다. 중화학공업 육성의 기반이 마련되었고, 산업도시의 성장은 도시화를 촉진했다. 교육, 인력, 기술, 인프라 등 여러 분야에서 미래 산업화 사회를 준비하는 전략이 다층적으로 실행되었다.

물론 환경 문제, 도시 빈민, 노동 착취, 농촌 황폐화 같은 문제도 함께 발생했지만, 이러한 부작용은 당시로서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현실로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노력은 1970년대 이후 고도성장의 발판이 되었으며, 한국 산업 근대화의 결정적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